《유언을 만난 세계》를 읽고 죽음을 의제로

“불온(不穩)함”이란 ‘사상이나 태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향’을 말한다. 투쟁하는 장애인은 우선 몸 자체로 반자본적이고 반체제적이라는 의미에서 불온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책 《유언을 만난 세계》의 주인공 여덟 명은 수명(壽命)을 다해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니라, 불온한 투쟁 과정에서 유일하고 고유한 생명을 스스로 버려 죽음을 선택했거나 죽임 당했거나 일찍 죽음으로 쓸려갔다는 점에서, 불온의 맨 끝을 넘어선 장애인들이다. 목숨껏 살지 못하고/않고 목숨의 반대편인 죽음으로 넘어갔다는 점에서 그들은 우선 스스로에게 위험한 존재들이고, 자신의 삶과 죽음을 통해 반자본적이고 반체제적인 투쟁을 열망했다는 점에서 세상에 대해 위험한 존재들이다. 그러니 외람되더라도 나도 좀 위험하고 솔직한 독후감을 쓰려고 한다. 외람되고 위험한 글에 대한 양해는 이 문장 한 번으로 갈음한다.

《유언을 만난 세계 -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정창조 외, 오월의봄) 표지 이미지. 표지는 최옥란 열사의 유서로 만들어졌다.
《유언을 만난 세계 - 장애해방열사, 죽어서도 여기 머무는 자》(정창조 외, 오월의봄) 표지 이미지. 표지는 최옥란 열사의 유서로 만들어졌다.

나는 장애인권운동과 장애인 당사자 활동가들이 부러웠다. 싸울 작정을 한 장애인이 거리의 시민들 사이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비장애인들의 세상에는 방해이고 훼방이다. 쓸모와 효율을 최고로 치는 사회에서 몸 자체로 쓸모없는 존재인 그들의 투쟁은 그 자체가 근본적이다. 내가 그들만큼 분노가 치밀지 않는 것은 그들과 다른 내 몸의 조건에서 시작한다. 그러니 그들의 투쟁 곁에 서든 멀리서 보든, 나도 그들처럼 장애인이 되어야 그들만큼 분노와 복수심이 끓어올라 그들의 눈빛과 몸부림과 괴성이 나올 거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어느 날 사고로 장애를 갖거나 스스로 비장애의 몸을 파괴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절망과 분노 속 열정이 부러웠다. 지체장애인으로 목발과 수동휠체어를 거쳐 요즘은 전동휠체어를 주로 이용하는 장애여성 활동가 친구가 SNS에 가끔 올리는 이동권 관련 차별현장과 항의과정에 대한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막 신경질이 돋는다. 이 성질머리 그대로 장애인이 되어 장애운동을 한다면 길게 살지 못하고 죽어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 지경이다.

게다가 장애열사들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홈페이지에서 나열하고 있는 10개의 열사분류 목록에도 없고, 당시의 시대적 과제라는 민주화, 통일, 노동, 여성주의 등의 사회 운동과도 가깝게 만나지 못했다. 자신들의 몸과 생계와 일상에서 출발해 장애운동, 노점상운동, 빈민운동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한 채 막 바로 죽음에 이르렀다. 그만큼 장애인들의 현실은 비장애인들의 현실과 멀었고, 그러니 장애열사들의 자살은 절망과 외로움 속 막다른 열망으로 인한 자신과 세상에 대한 폭거였다. 죽음 말고는 일상과 소신을 제대로 살아낼 길도 알릴 경로도 없는 절망과 열정, 그 통(痛)과 쾌(快)를 몸 안에 부대끼며 더는 살 수 없었던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리라 가늠한다.

내게 예수는 어느 옛날 서른에 시작한 운동을 서른셋까지 하다 죽은 젊은이다. 서른에 운동을 시작해 예순다섯이 되도록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으로서 그의 이른 죽음이 늘 부럽다. 1991년을 비롯해 내 서른 초반에는 운동권 죽음이 널려 있었고, 나 역시 죽을 때인가를 생각했었다. 그때도 안 죽고 그다음 언제들에도 안 죽고 아직 살아있다. 더 산 30여 년 사이 세상은 갈수록 각개전투의 장이 되었고 운동은 갈수록 자본과 국가의 덫에 갇혀갔다.

같은 마음으로 일찍 죽은 여덟 명 주인공들이 부럽다. 더 살아 함께 싸웠다면 장애인권운동이 더 확장되고 장애인의 현실이 좀 더 나아졌을 수 있지만, 장애운동의 근본 전선인 반자본과 반체제를 향한 진전은 불가능했을 거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더 큰 좌절과 자괴에 시달렸으리라는 생각에 이른 죽음들이 부럽다. 죽음으로 싸울지 살아서 싸울지는 각자의 선택이지만, 전선도 삶도 갈수록 죄어오는 덫에 옭아매어진 채 여전히 싸운다는 건, 막막하고 신경질 나며 지루하고 비루한 일이다. 쾌(快)와 통(痛)의 높이와 깊이를 조절하고 전략하며 싸우고 싸우다 늙어가는 것이다. 절망하지 않기 위해 희망 없이, 지쳐버리지 않기 위해 하염없이 지키는 일이다.

한편 갈수록 느닷없이 부닥치고 여차하면 스러지는 죽음들이 늘어가고 있다. 모두가 한번 죽는다는 것만 사실일 뿐 죽음이 아닌 삶 편에 아직 있는 것이 도무지 설명 불가능한 세상이다. 죽음의 경로는 목격이라도 되지만 죽지 않은 이유는 목격도 설명도 불가능하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과 주변을 위해 열심히 살아보려고 발을 그쪽으로 디뎠거나 손을 저쪽으로 잡았는데 문득 죽음으로 빨려 들어가는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다. 슬프다는 말도 마음도 붙일 사이가 없다. 이런 세상에서 그/녀가 죽고 내가 산 것은 우연 덕/탓일 뿐이다. “애도”도 “명복”도 침도 안 바르고 하는 거짓말마냥 흔해빠졌다. 섣부른 애도와 죄책감은 모든 생애와 죽음마다에 연루된 사회와 정치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다. 죽은 자에 대한 산 자들의 몫이라면 기억과 재/해석과 책임감이다.

장애해방열사들의 영정 앞에 국화가 놓여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장애해방열사들의 영정 앞에 국화가 놓여 있다. 사진 비마이너DB

투쟁 과정이 아닌 자괴와 포기로만 여겨지는 자살이라 하더라도, 그 이면인 사회적 타살에 대한 시비와는 별도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처분한 선택 앞에 감히 슬프다거나 안타깝다는 말을 보태는 것을 삼가게 된다. 말을 보태기엔 세세한 처지와 심정을 알지 못한다. 스스로를 궁극적으로 파괴하고자 하는 순간에야말로 인간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만 속한다. 그런 면에서 모든 자살은 자유죽음이기도 하다. 굴욕과 수모에 짓눌리다 죽음을 결단한 타인 앞에서 “그래도 인생은 살만하다.”는 말을 하지 못하겠다. 그는 이미 자신과 타인들의 그 비슷한 말에 숱하게 속아왔을 터다. 혹은 대체 왜 마침내 끝까지 일단 살아야 하는가? 가망이 없어 보이는데 대체 누가 감히 더 견디라며 무책임한 조언을 할 수 있는가? “오죽하면 죽었을까”, “더 살았다 한들 무엇이 나아졌겠는가” 싶은 삶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모든 사람은 출생 순간 죽음을 선고받는다. 게다가 노쇠와 질병, 빈곤과 소외와 무력함, 장애와 배제 등 고단한 개인들의 수많은 문젯거리들을 일거에 정지시켜주는 것이 죽음인 것은 어쨌든 사실이다. 어떤 사람에게 자살은 마지막 존엄과 자유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주체적 결단이고 실존적 행위이다. 자유죽음은 자유와 이성을 추구하는 인간이 최종에 선택하는 자유롭고 이성적인 결단이다. 그들은 자살로 자신들의 몫을 마쳤고, 남은 자들은 따로 또 같이 자신들의 몫을 살아낼 뿐이다.

그러니 산 자들은 따로 또 같이 각자와 우리들의 몫을 살아낼 일이다. 모든 ‘비정상’들에는 우울과 분노, 도발과 저항이 뒤엉킨다. 삿대를 단단히 쥐고 마음과 삶의 향방을 최대한 주도할 일이다. 불온함과 변태(變態)야말로, 돈과 가족이 최고라는 세상의 끝에서 재난을 즐겁게 통과하고 다음 재난을 맞이할 힘을 키우는 잉여들의 가오다. 먼저 추락한 사람들 덕에 더 추락해도 살아지겠구나 싶다. 하염없이 희망 없이, 때론 전략적으로 좀 쉬면서, 우리들의 놀이판을 벌이며 싸우자. 즐겁게 놀며 싸우는 것이 사는 맛 중 최고임을 아는 사람은 안다. 그 끝에 죽음을 만나거나 적당한 때에 죽음을 집어 들면 된다.*)

어떤 삶과 죽음을 각별히 기억하고 기록하며 죽은 후에 반복해서 재해석하는 일은, 죽은 자의 생애 내력과 그 연장으로서의 죽음을 되짚어 결국 산 자들의 현재를 돌아보고 장차를 모색하자는 것이다. 목숨을 내어준 사람들과 그들의 이름과 삶과 죽음을 기록한 사람들의 뜻이, 함께 읽는 이들 속에 새롭게 살아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