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권리 보장 요구하니 혐오와 욕설 쏟아지는 지하철
최옥란 열사 20주기 맞은 2022년 지하철 역사 내에서 추모제 진행
“자본주의 사회의 속도를 멈추자” 결의
24일 저녁 7시, 충무로역 지하 4층 환승 통로에서 ‘최옥란 열사 20주기와 장애해방열사 합동
추모제’가 열렸다. 장애해방열사의 영정 앞에 한 활동가가 헌화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24일 저녁 7시, 충무로역 지하 4층 환승 통로. 아침 8시부터 종일 지하철 연착 투쟁을 벌인
장애인 활동가들에 대한 경찰의 불법 채증 문제로 현장은 아수라장이다. 장애인 활동가들은
관등성명을 밝히지 않고 채증하는 경찰과 서울교통공사 직원들에 대해 강하게 문제제기했지만,
이들은 신원을 밝히긴커녕 사람들 사이로 줄행랑쳤다.
경찰은 추모제 참석자들을 폴리스라인 안에 가두려고 했다. 환승통로 공간이 넉넉지 않은데
폴리스라인 기둥을 설치하면 휠체어 이용자들은 이동하기 불편하다. 활동가들의 문제제기로
폴리스라인이 거둬지는 듯싶더니, 그 자리는 이내 곧 방패를 든 경찰들로 채워진다. 경찰이
추모제 참석자들을 둥그렇게 에워싼 것이다.
추모제에 참석한 장애인 활동가들. 환승 통로의 기둥에는 열사들의 사진과 약력이 적힌 종이가
걸려 있다. 사진 강혜민
최옥란 열사 20주기와 장애해방열사 합동 추모제가 열리는 충무로 지하역사. 지난해부터
지하철 시위를 하며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요구해온 장애인들에게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지하철, 이곳이 바로 우리 투쟁의 공간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사회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 진실의 공간이기도 합니다. 숨겨져 있던 혐오와 온갖 욕설, 차별이 여기에 있습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열사위원회 위원장)
장애인에게 ‘따뜻한 사랑과 배려’를 건네던 사회는 장애인이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며
비장애인중심사회를 멈춰 세우자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다. ‘불쌍한’ 장애인들에게 ‘시혜와
동정’은 줄 수 있지만 권리는 보장해줄 수 없다는, 이 사회의 민낯을 이제야 명확히 확인하는
중이다.
열사가 ‘살아있는 이들의 응답’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지하철은 열사 추모제
공간으로 마땅했다. 2022년 3월 24일, 충무로 환승통로는 오늘날의 활동가들과
장애해방열사를 잇는 통로가 되었다.
추모제에 참석한 장애인 활동가들이 투쟁을 외치며 결의를 다지고 있다. 사진 강혜민
- 2002년 4월 시작된 진보적 장애인운동의 깃발 “장애인차별철폐하라”
2002년 3월 3일 정태수 열사가 떠나고 3월 26일 최옥란 열사가 떠났다. 최옥란 열사는
장애여성이자 빈민, 노점상으로 살면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문제점을 최초로 제기한
사람이다. 그는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요구하며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농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터무니없이 낮은 수급비로는 살 수도 없고, 노점을 하면 수급권이 박탈되는 현실
속에서 끝내 음독자살한다.
장애인운동을 만들어가던 두 명의 동지를 한꺼번에 잃은 3월이 지나고 4월이 찾아왔다.
그해 4월 20일, 진보적 장애인운동계는 이날을 정부가 정한 시혜와 동정의 ‘장애인의 날’이
아닌 ‘장애인차별철폐의 날’이라 새롭게 명명하며 정부를 향한 투쟁을 선포했다. 그 세월이
20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그간 진보적 장애인운동은 수많은 권리를 발명해냈다. 이동권을 비롯해 활동보조서비스와
탈시설을 권리로 보장할 것을 국가에 요구했다. 한강대교 아스팔트 바닥을 기면서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를 쟁취하고, 광화문역에서 1842일간 농성하며 장애등급제 폐지,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 수용시설 폐지를 요구했다. 장애인은 탈 수 없는 버스 밑으로 기어
들어가 버스를 멈춰 세우고, 휠체어리프트로 사망한 이를 기리며 상복을 입고 지하철을
점거했다.
2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열사들이 잊히지 않았던 이유는, 이처럼 이들을 기억하며
싸우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 이동권 완전 보장’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있는 장애인 활동가가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노동에서 배제된 최중증장애인이 노동으로 세상을 바꾼다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주최로 열린 장애해방열사 합동 추모제에서 장애인
활동가들은 특히 장애인을 배제하는 노동시장을 규탄하며 중증장애인 권리중심 맞춤형
공공일자리(아래 권리중심일자리)를 통해 노동의 주체로서 장애인의 목소리를 더욱 또렷하게
내어 세상을
바꾸겠다고 결의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장애인은 노동할 수 없는 존재로 낙인찍혀 시설에 수용됐다. 따라서
장애인운동의 역사는 노동권 쟁취를 위한 역사이기도 했다. 다만, 과거엔 장애인이
자본주의시장 질서로 들어가기 위한 제도적 발판을 요구해왔다면, 현재는 자본주의 임금노동
개념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노동 개념을 제시한다.
권리중심일자리가 그 대표적 사례다. 기존 임금노동시장에서 배제되었던 최중증장애인이
장애인식개선 강사, 장애인권리옹호활동, 문화예술활동 세 가지 직무를 통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이 한국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한다. 민간기업에
고용되어 자본의 이윤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이 아닌, 장애인을 공공(정부와 지자체)이
고용하여 사회적 가치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일자리다.
조상지 노들야학 학생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권리중심일자리에서 일한 후 제 삶은 달라졌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 보면 종종 사람들이
제게 어디 가냐고 묻습니다. ‘일하러 간다’고 하면 세상 참 좋아졌다는 이야길 듣습니다. 그때
저는 나라에서 알아서 일자리 준 게 아니라 20년간 장애인이 싸워서 만들어낸 거라고 말합니다.
이동권 확보, 장애인식개선, 저상버스 100% 도입이라는 투쟁 구호가 이제 내 삶의 목표가
됐습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고 내 자신을 생각해왔는데, 이젠 노동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권리 생산의 주체로 바뀌었습니다. 중증장애인을 권리 생산의 주체로 만드는
공공일자리가 전국에 100만 개 만들어지는 날까지 싸우겠습니다.” (조상지 노들야학 학생)
피플퍼스트 성북센터에서 활동하는 송지연 활동가는 “발달장애인이 세상을 뒤집자”라고 외쳤다.
송 활동가는 “나는 정규직으로 일하는 발달장애인을 본 적도 없고, 나 또한 이곳에 오기 전까지
정규직 일자리를 가져본 적 없다. 발달장애인은 판단을 못 하고 끈기가 없다며 단순업무만 준다.
과거 복지관에서 일할 땐 한 번도 회의에 들어가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송 활동가는 “똑같이 일하는데 왜 발달장애인은 최저시급조차 받지 못하나. 보호작업장에서는
10년, 20년 일해도 10~20만 원밖에 안 준다. 보호작업장에서 일하는 어떤 분은 문제행동 즉시
잘릴 수 있다는 협박성 이야기도 들었다”면서 “우리 모두 일할 권리가 있으나 이 사회는
발달장애인이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들지 않고 있다. 정태수 열사가 노동권 투쟁을 위해
1500명을 조직했듯, 발달장애인 1500명이 나와서 싸운다면 세상을 뒤집을 수 있다”고 외쳤다.
진은선 장애여성공감 활동가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최옥란 열사는 장애여성이기도 했다. 진은선 장애여성공감 활동가는 “나 또한 장애여성으로서
수많은 차별을 겪었다. 보호나 배려로 이름 붙은 차별들은 너무나 일상적으로 일어나서
차별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면서 “그러나 장애여성운동을 만나 장애여성으로서 겪은
차별을 말할 수 있는 언어와 힘을 배웠다”고 밝혔다.
진 활동가는 “여성의 몸에 대한 평가가 자연스러운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정상이라는 기준에
내 몸을 계속 끼워 맞춰야 했다”면서 “장애운동의 역사가 그래왔듯 개인의 문제가 아닌 비장애
중심의 성차별적 구조의 문제를 중요하게 드러내야 한다. 우리의 운동이 먼저 성차별을
고민하고 변화를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애인문화예술판에서 정태수·최옥란 추모연극을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문화노동자 김종환·이혜규 씨가 추모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 지하철을 멈춰 자본주의 사회의 속도를 멈추자, 더 밑으로 내려가자
추모제에서는 장애해방열사들의 삶을 기억하며 앞으로의 운동에 관한 전망을 밝히는
목소리들도 이어졌다.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사무국장은 “최저생계비는 전체 국민소득과 비교해 계속 낮아져
수급자들의 삶의 질은 전체 국민 삶의 질에 비해 후퇴했다. 20년 전에도 지금도 16%의 빈곤율
대비 수급률은 3%에 불과하다”면서 “수급자가 되기도, 수급자로 살기도 힘든 사회가 바로
2022년의 한국”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최옥란 열사 20주기를 맞아 다시 결의하자.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사각지대를 없애고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통해 빈곤과 불평등을
끝장내자”고 외쳤다.
정창조 박종필추모사업회 사무국장은 “20년 전에는 타지도 못했던 지하철을 지금은 우리가
막고, 저상버스를 타고 야학에 가며, 권리중심일자리를 만들어냈다. 무시당하던 사람들이, 저
위정자들이 아닌 바로 우리가 이곳에서 열사분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고 있다”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장애인을 죽여가며 브레이크 없이 흘러가는 역사를 열사들과 함께 지하철을
멈춤으로써, 그 역사를 멈추고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자”고 말했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열사위원회 위원장이 추모제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진 강혜민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열사위원회 위원장은 자신을 조직해 낸 박흥수·정태수
열사와의 일화를 이야기하며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자’고 제안했다. 더불어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예산 반영을 윤석열 당선자가 약속할 때까지 계속해서 출근길
지하철을 탈 것이라고 선포했다.
“20년의 투쟁으로 마이너스 100이었던 삶이 0으로 맞춰지면서 장애인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밑으로 내려갑시다. 그곳에서 아직도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삶들을 만납시다. 자본주의 방식으로 말하자면, 시설에 갇힌 사람들은 ‘견적이 안 나오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들을 감옥 같은 시설에 가둬놓은 게 복지와 사랑이라 말하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우리는 더 밑으로 내려가서 그들을 만납시다. 그게 운동이고 우리가 겪어야 할
약속이고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아침 우리는 또 지하철을 탈 것입니다. 윤석열 당선자가 집무실을 용산으로 이전하는
단력이 있으면 장애인권리예산 또한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획재정부와 함께
장애인권리예산 약속할 수 있도록 전장연은 또 지하철을 탈 겁니다. 경복궁역에서 혜화역까지,
.매일 아침 지하철 탈 겁니다.” (박경석 위원장)
한편, 420공투단은 충무로역에서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요구하며 1박 노숙농성을 한 후
다음날 오전 7시, 3호선에서 24차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진행했다.
24일 저녁 7시, 충무로역 지하 4층 환승 통로에서 ‘최옥란 열사 20주기와 장애해방열사 합동
추모제’가 열렸다. 장애해방열사의 영정 앞에서 한 활동가가 헌화 후 묵념하고 있다. 사진 강혜민
